(보은)풍류는 진선미의 사상이고 동학은 풍류도를 재정립하여 부활 

- 일시: 2023-4-22~23
- 날씨: 황사있었지만 대체로 맑음 
- 몇명: 홀로

 

풍류(風流)를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로 국어 사전에 되어있지만 이것은 너무 개괄적입니다.사실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난해한 구석이 있습니다.풍류는 짧게 말하면 진.선.미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도나 종교의 수준까지 다다른 것을 풍류도 혹은 풍류교라고 합니다.결국 풍류는 종교와 도덕과 예술을 포함합니다.최치원에 따르면 이 풍류도의 내용은 3교를 두루 포함하는데, 브리테니카 백과사전의 풍류 설명을 보면 ①도의로써 몸을 닦고(도덕/善), 물론 몸을 닦는 표현으로 보면 몸을 닦는다는 표현에서 군사적인 의미 포함입니다.힘이 있어야 비굴하지 않게 바른 도덕을 지킬 수 있습니다.②노래와 춤으로써 서로 즐기며(예술/美) ③(제의를 위해) 명산대천을 찾아 노니는 것(종교/眞) 등으로 귀결됩니다.

한류는 풍류를 모두 포함합니다.예술적인 표현은 밖으로 드러나니 금방 눈치를 채지만 도덕적인 부분은 우리는 늘 그 속에 젖어 살아서 잘 모릅니다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잘 드러납니다.우리의 컨텐츠는 중동지역에서도 막힘이 없은 것을 보면 잘 나타납니다.서양처럼 노골적이지 않으며 일본처럼 비장하지 않습니다.중국처럼 허황되지도 않습니다.이 부분이 서양과 다른 점이며 같은 동양의 중국과 일본과의 큰 차별점입니다. 풍류는 전세계인이 수용 가능한 보편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풍류는 
한恨과 흥興과 무심無心이 합쳐진 개념으로 풍류란 패기(pathos) + 논리(logos) + 신내림(ethos)이 "절묘하게 조화妙合"이 되어야 합니다.자연과 예술과 인생을 모두 보여주는 보은에서 "한 멋진 삶"을 엿보았습니다.보은 지역이 넓지 않다보니 차를 타고 임한리 솔밭,우당고택,삼년산성,동학혁명기념공원으로 곧바로 이어지며 각각의 장소에 따라 한恨과 흥興과 무심無心을 보았습니다.

충청도 보은(報恩)은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 그대로 지역명이 되었습니다.결초보은의 땅 보은에서 우리나라 풍류에 대한 생각을 정립 할 수 있었습니다. 

 

 

 

▷ 답사일정(風輪) :508.8km

 

임한리 솔밭공원-보은 우당고택-삼년산성-동학혁명기념공원-북실마을

 

2023.4.22

 

임한리 솔밭공원:충북 보은군 탄부면 임한리 116-1


토요일 밤 10시가 좀 안되어 부산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역시 한밤의 도로사정은 좋습니다.

 

2023.4.23

 

한밤인 1시가 지나 임한리 솔밭공원 근처에 주차하고 휴식을 취한 후 아침 6시에 일어나 임한리 솔밭으로 갑니다.  워낙 사진가들이 많이 찾아서 장소는 눈에 익었지만 저는 처음 찾았습니다.

안개 끼는 10월 시기가 출사의 적기이지만 그때 오면 사진가들로 붐비기 때문에 이런 장소를 봄에 와 홀로 독차지 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유홍(兪泓,1524~1594)의 시비가 보이는데 유홍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지숙 , 호는 송당 , 시호는 충목 , 본관은 기계입니다.시문이 뛰어나 선조가 그의 시를 보고 직접 화운하기도 했고 독서를 좋아해 소장한 책이 1만 권에 달했다고 합니다.1594년 좌의정으로서 해주에 있는 왕비를 호종하다가 객사한 것으로 나옵니다.유저로는 송당집 4권이 있습니다.

유홍이 귀국할 때에 산해관 주사 山海關 主事인 마유명 馬維銘이 송별시를 지어준 것에 화답하는 유홍의 광국시와 아버지의 사마시 司馬試 동기 생신을 축하하는 시 두 편이 시문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중 "선군사마동기 생신축시"를 보면 

秋花暎壽席 (추화영수석) 가을 국화꽃은 축수의 자리에 빛났고
歡樂及佳辰 (환락급가진) 기쁘고 즐거움이 아름다운 생신에 미치네
玉裂調淸唱 (옥렬조청창) 옥을 굴리는 듯 맑은 창곡은 흐르고
山頹醉上賓 (산퇴취상빈) 산이 기울도록 윗 분은 취하셨네
軒昻一嵆鶴 (헌앙일혜학) 의기양양한 한쌍의 백학이요
森列五徐麟 (삼렬오서린) 장엄하게 늘어선 다섯 아들이라
自是悲兼喜 (자시비겸희) 스스로 이에 슬픔과 기쁨을 겸하였으니 
題詩欲濕巾 (제시욕습건) 글을 지으려함에 눈물이 수건을 적시고자하네

 

송당 유홍의 시는 수승대에서도 보였고 고산정에서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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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 유홍의 거창 수승대 시

....

우뚝 솟은 강 가운데의 커다란 바위

이곳에 오르니 흥이 저절로 아름답네

연못의 물엔 빗방울이 떨어져 번지고

산의 모습은 반쯤 연무에 잠겨 있네

빼어난 경치 새로 그린 그림처럼 산뜻한데

옛 사람은 가고 없어 옛날 생각에 슬퍼지네

이끼를 긁어내며 고인의 목적을 찾는데

구름장 사이 햇살이 붉은 억덕에




고산정 시에 차운하여 동료 형 금문원에게 부치다 /

次孤山亭韻 寄僚兄琴聞遠(차고산정운 기료형금문원)

 

귀한 선물은 비단에 놓은 수보다 나아서 / 珍貺知踰錦繡端(진황지유금소단)

퇴계의 시 속에 고산이 들어있구려 / 退溪詩裏得孤山(퇴계시리득고산)

그윽한 정자의 가장 멋진 풍경은 가을 월명담 / 幽亭最勝秋潭月(유정최승추월담)

옥거울처럼 맑디맑고 새하얀 비단처럼 눈이 시리네 / 玉鏡澄澄素練寒(옥경징징소련한)

 

- 송당 유홍

 

 

1990년 삼가저수지 조성에 공이 많은 당운 유창식 선생의 공적비가 보입니다.

이제 햇살이 산등성이를 넘나봅니다.

누렇게 변한 풀이 꽃처럼 반짝이고 솔나무는 풍류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 같습니다.

소나무 손짓에 산도 함께 위 아래로 율동에 맞추어 넘실거리는 것 같습니다.

 

 

보은 우당고택: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0-2

 

 

보은 우당고택은 두갈래 물속에 섬처럼 보이는 곳에 위치합니다.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인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으로 보입니다.


구한말 전남 고흥에 우당 선영홍(1862-1924)이라는 갑부가 살았는데 고흥의 거금도에서 살았는데 육지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산물 교역으로도 큰 돈을 벌었습니다. 당시 고흥의 최고 갑부였다고 합니다. 소작료를 적게 받았고 대흥사라는 기숙학교를 세워 가난한 집안의 인재들이 공부할 수있게 도왔으며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서 1922년에 선생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분은 구례 운조루나 경주 최부자댁 같은 명당을 얻고 싶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육지의 섬에 터를 잡아야 자손 대대로 복을 받는다" 말을 듣게 됩니다.  

보성 선씨 선정훈이 당대의 제일가는 대목들을 불러 1919년에 착공하여 2년 뒤인 1921년에 우당고택을 완공하게 되고 선연홍 선생은 3년 동안 살다 세상을 떠나고 사후에 장자인 남헌 선정훈 선생이 가업을 계승합니다.남헌 선생의 좌우명은 "위선최락爲善最樂"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다."는 것인데 이 또한 풍류도의 맥락과 겹칩니다.

전국 팔도의 장독이 있습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담장은 흡사 궁궐의 담장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전통한옥 대저택으로 원래는 100여칸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솟을대문 앞의 흰꽃나무(꽃산딸나무로 추정) 두그루가 더욱 멋을 더합니다.

"관선정(효열각 옆에 있음)기적비"를 보니 선善에 대한 관념을 읽을 수 있고 그 결과물로이겠지만 남헌 선정훈선생 공덕비가 보입니다. 좌측에 선영홍의 시혜비도 있습니다.

사랑채로 보이는 H자 형태의 대저택이 보입니다만 아직도 살고있는 살림집이고 워낙 제가 이른 아침에 왔기 때문에 더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흙돌담장과 꽃이 잘 어울립니다. 보은 우당고택은 안채와 사랑채,사당의 세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행랑채가 있는 구조로 특이합니다.

삼년산성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주1길 104

 

현존하는 2000여개의 산성 중에 축조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산성입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470년(자비왕13년)에 처음 석성을 쌓고 16년뒤인 486년에 장정 삼천명을 동원하여 증축하였으며 서기 712년(경덕왕 원년)에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보은의 삼국시대 명칭이 삼년산군으로 불렸기 때문에 삼년산군에 있는 산성이라는 이름으로 삼년산성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 같습니다.그렇지만 하나의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습니다. 위에 설명했듯이 팩트로 보면 3년만에 쌓은 것은 또 아니라서 아이러니합니다. 

 이곳은 20년만에 다시 찾은 곳인데 과거보다는 훨씬 더 정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하튼 서문지 출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산성의 모습을 보면 단 한번도 똟린 적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인 이유를 알게 됩니다.높이는 13~20M 정도로 높게 쌓여있는데 특히 경사도가 굉장히 가파릅니다.여기에 폭은 8~10M정도로 돌로 켜켜히 쌓았으니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성문 설치 장소로 보이는 주춧돌도 보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유를 이 삼년산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미지(蛾眉池)라는 암각자가 보입니다.신라의 명필가 김생의 글씨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인데 지금도 물은 아주 풍부한 것으로 보입니다.

몇번을 보아도 성을 쌓은 공력에 압도됩니다. 

이곳은 삼국통일 전쟁 때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접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습니다.한마디로 당나라 사신에게 압도되게 할 목적이었을겁니다.이후 고려 태조 왕건이 이 성을 점령하려고 하였으나 크게 패했습니다. 

풍류와 닿아있는 신라의 화랑도는 신라의 청소년들로 이루어지고 심신 수련을 하던 무사조직이었습니다.도의로서 몸을 닦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군사적인 측면에서 신라 화랑도의 세속오계(사군이충,사친이효,교우이신,임전무퇴,살생유택)에서 뚜렷이 읽을 수 있습니다. 원광법사의 탁월한 식견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정리,표현되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삼년산성 내에 있는 절인 보은사 프로그램에 화랑 실습 체험이 있군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충북 보은군 보은읍 동학로 236-22

 

조선 오백년 동안 영화를 누려온 양반 중심 시회는 갑오년을 전후하여 새로운 변화를 맞게됩니다.1893년 충청도 보은군의 장안 마을과 전라도 금구현의 원평마을에서 부패척결과 외세 침투를 배척하는 동학집회가 대대적으로 열렸습니다.전국 각지에서 보은땅으로 몰렸습니다.동학대도소가 위치한 지금의 장안평 장내리가 목적지였습니다.수만의 동학도들은 왕조정부에 보국안민(輔國安民),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주장을 제기하였는데 "나라를 바르게 하여 백성을 살기 편하게 만들고,일본과 서양의 침입을 막아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894년 12월16일(음력)장거리 행군으로 지친 북실마을(위령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의 김소촌가에 모여있었는데 이때 일본군이 기습하여 <토비대략> 자료에 의하면 무려 2600여명이 최후를 맞았다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격전지 중 한 곳이 보은군 성족리 일원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인간평등의 실현,사회비리의 척결,외국 침략세력의 배척이라는 대의명분으로 목숨을 걸고 봉기했습니다.
이로서 수백년간 이어져 온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를 열리게 된 점을 보면 실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왕과 관료들이 청나라 군대와 이를 따라 들어 온 일본군은 우리나라에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이런 시대적 상황을 참다못한 우리의 유생과 백성들은 동학을 통해 이 땅에 자주권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이후 3.1운동과 4.19의거,최근의 촛불혁명 등  우리의 국민들은 중국이나 일본과 다르게 항상 불의에 항거하는 국민입니다.

정치 지도자와 관료들이 국민을 위한 일을 잘해줘야 하는데
최근의 일처리와 발언을 보면 내우외환의 징조가 보여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들은 옳은 일을 할 것이라고 봅니다.

풍류도와 동학은 아래 더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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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최제우 선생이 창시하고 민중을 사로잡은 동학의 사상적 배경은 1.우리의 고유 사상인 풍류도(風流道)를 뿌리로 삼아 성립되었다.풍류도는 '포함삼교 접화군생(包含三敎 接化群生)'을 지향한다. '모든 사상과 두루 소통하면서 뭇 생명을 다 살려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사상이다. 동학은 이 같은 풍류도를 후천 시대의 개벽(開闢) 상황에 맞게 재정립해 부활시킨 것이다.둘째, 동학의 사상적 원천은 신라 천년 역사를 지탱해 온 대승불교(大乘佛敎)로 원효(元曉, 617~686) 스님의 화쟁사상 및 실천적 불교 운동과 통하는 바가 많다. 삼국 간의 정복 전쟁 시대, 즉 피로 날이 새고 피로 날이 지던 시대를 산 원효와 '백성이 단 한때도 편안한 날이 없었던(民無四時之安)' 조선 말 격동기를 살았던 최제우 선생은 모두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새로운 사상가로 우뚝 섰다.셋째, 동학이 나오게 된 근원에는 최제우의 부친 근암(近庵) 최옥(崔鋈, 1762~1840)으로 이어져 내려온 퇴계학(退溪學)이라는 학문적 전통이 있다. 최옥은 경주 일대 선비 400여 명과 교류하던 유명한 학자이자 퇴계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선비였다.최제우 선생은 부친으로부터 유학을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넷째, 동학 성립과 관련해 가장 주목할 만한 사상은 서학(西學)이다. 흔히 서학을 천주교, 즉 종교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서학은 서양 학문 또는 서양 문명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를 비롯해 서양 학문, 서양의 정치경제, 서양의 과학기술 등을 모두 망라하는 개념이 바로 서학이다.이 같은 서학이 동학을 창도하는 데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최제우 선생은 젊은 시절에 천주교 신앙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과 교류했고, 지식인 사이에서 유통되던 다양한 서학 서적을 탐독했다.다섯째, 동학은 또한 민간을 중심으로 널리 유행하던 샤머니즘은 물론 『정감록』 같은 비기도참(秘記圖讖) 사상도 수용했다.동학은 그냥 저절로 솟아난 것이 아니다. 유불선 삼교 사상을 사상적 창조의 기반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당시 가장 첨단 사상이던 서학마저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조선 후기 민중 사상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정감록』 사상도 포용했다.이런 사실은 동학의 사상적 기반이 매우 깊고도 다양하며, 선생의 학문적 축적이 결코 간단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학(學)은 쌓는 것이고 도(道)는 비워 내는 것이다.그럼 무엇을 쌓고 무엇을 비워 낼 것인가? 그것은 "차이"다.차이는 차이를 낳고 분별은 분별을 낳는다.차이를 더 하면 결국 나는 고립된다,서양 철학은 학에 가깝고 동양 철학은 도에 가깝다.하늘이 곧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나와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곧 전체이다.삶과 죽음조차 다르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학(學)은 공부를 해야하고 (도道)는 수련을 해야하며 교(敎)는 믿는 것이다.동학은 학(學)이며 종교 같지 않은 종교이고 그래서 동학은 여타 종교 같이 "믿는 것"이 아니라 동학은 "하는 것"이다.믿어야만 하는 것은 기적도 포함되지만 궁극적으로 미신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반증이다.서학이 인격신을 믿는 것이라면 동학은 인격신은 믿지 않는다.스스로 그러하다는 노자의 도법자연(道法自然)과 동학의 무위이화(無爲而化)는 상통한다. 이런 사상이 곧 고조선 사상이며 국선의 화랑,조의선인,무절을 거쳐 동학으로 이어졌다. 노자가 동이족이었다는 것은 한민족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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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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